[창간 37주년 특별기획] 백석8블록 청년들의 공동체 실험

지난 5월 백석동 8블록에 문을 연 베란다에서 이웃 주민들이 모임을 갖고 있는 모습. 조민경 제공
지난 5월 백석동 8블록에 문을 연 베란다에서 이웃 주민들이 모임을 갖고 있는 모습. 조민경 제공

 

골목상권을 살리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동안 수없이 반복되어 온 행정의 공모사업과 외부 자본의 투입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장면이 백석8블록에서 펼쳐지고 있다. 동네서점에서 시작된 만남이 음식점과 카페, 동네 술집으로 이어지고, 손님은 단골을 넘어 이웃이 되며, 돈의 흐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비경제적 관계망이 골목의 체온을 바꾸고 있다. 고양신문은 창간 37주년 기획으로 백석8블록 청년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작은 실험을 통해 ‘공동체’와 ‘지역순환경제’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들여다본다.

일산 백석동 동네서점에서 싹튼 만남
카페 오픈 도우며 비경제적 연대 경험
독서·풋살 모임, 관계망 점차 넓혀
손님이 이웃으로, 느슨하게 이어진 순환
자생적 생태계 지켜줄 행정 역할은 과제


[고양신문] 지난달 일산동구 백석동의 한 골목 어귀에 문을 연 브런치 가게 ‘베란다’. 이곳엔 여느 신상 카페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흔적이 남아 있다. 벽에 은은하게 밴 손자국, 투박하지만 정감 가는 나무 선반, 완벽하게 다듬어지지 않아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는 마감까지. 이 공간은 전문 인테리어 업체의 손길로 완성된 곳이 아니다. 지역 예술가가 땀을 흘렸고, 이웃 자영업자들이 함께 팔을 걷어붙였으며, 놀러 왔던 동네 청년들도 기꺼이 롤러를 손에 쥐었다. 누군가는 벽지를 뜯어냈고, 누군가는 페인트를 칠했으며, 또 누군가는 새참을 챙겨 보냈다.

“인테리어 밑바탕 작업을 하는 동안 스무 명은 넘게 왔다 갔다 한 것 같아요. 저 혼자였으면 절대 못 했을 일이죠.” 베란다 조민경 사장의 말이다. 함께 거들었던 조유이씨는 “처음엔 가벼운 청소 정도만 도울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벽지를 뜯고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다”며 “힘들었지만 뿌듯했다. 나중에 친구들 데리고 와서 ‘이거 다 내가 칠했어’라고 자랑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느낌이었다”고 했다.

인테리어를 총괄한 리혁종 작가는 이 진풍경을 두고 “관 주도의 기금 사업이나 대형 공모를 따내어 움직인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생활권 안에서 이미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이 이웃의 창업을 자기 일처럼 두 팔 걷어붙이고 거든 것. 그는 “단순한 금전적 계약 관계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비경제적 교환과 연대가 그곳에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 작은 카페의 탄생기는 현재 백석8블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거창한 도시재생 예산이나 외부의 기획 없이도, 서점에서 시작된 인연이 밥집과 카페, 술집으로 이어지며 소비자와 자영업자의 경계를 허무는 ‘느슨하지만 탄탄한’ 연결망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난 한달간 백석8블럭 베란다에서 진행된 인테리어 작업 과정
지난 한달간 백석8블럭 베란다에서 진행된 인테리어 작업 과정

독서모임이 쏘아 올린 작은 공 “가까운 사람들과 닿고 싶었다”
백석8블록의 조용한 변화는 이곳에 동네서점인 ‘세리서점’이 문을 열면서부터 싹텄다. 서점 주인 윤상근씨는 처음부터 원대한 골목 공동체를 기획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멀리서 한 번 찾아오는 손님보다는, 슬리퍼를 끌거나 자전거를 타고 올 수 있는 이웃과 오래 관계를 맺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있었다.

처음 독서모임을 모집할 때, 타 지역에서 온 참여 문의를 정중히 거절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중심이 돼야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시작은 더뎠다. 서점을 연 뒤 한동안은 사람들의 반응이 거의 없었다. 독서 모임도 한 명, 두 명 차곡차곡 모아 3개월 가까이 지나서야 간신히 꾸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느린 과정이 오히려 관계의 밀도를 촘촘하게 만들었다. 2주에 한 번씩 마주앉아 같은 책을 읽고 삶의 고민을 나누는 사이, 사람들은 서로를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손님’과 ‘주인’이 아닌 내 일상을 나누는 ‘이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윤씨는 “술자리에서 우연히 인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 사람이 무슨 고민을 하고 사는지, 앞으로 뭘 하려는지를 알게 되는 시간이 쌓였다”며 “그 과정이 반복되면서 관계가 깊어졌다”고 말했다.

독서모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독서 인구 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 책을 매개로 모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혼성 풋살모임’이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도, 서점 문턱이 조금 높은 사람도 남녀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함께할 수 있는 통로였다. 무엇보다 책과는 거리가 멀었던 청년들까지 자연스럽게 풋살장으로 모여들면서, 백석8블록의 관계망은 점점 서점 밖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작년 백석8블록에 문을 연 세리서점. 독서모임을 시작으로 풋살모임, 북콘서트, 전시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이곳 골목공동체 형성을 위한 거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작년 백석8블록에 문을 연 세리서점. 독서모임을 시작으로 풋살모임, 북콘서트, 전시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이곳 골목공동체 형성을 위한 거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집 앞에 나오면 다 있어” 고립된 1인 가구를 품은 골목
이러한 변화는 청년들의 일상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동네 주민이었던 20대 대학생 조유이씨는 어느 날 집 앞에 생긴 서점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책을 추천받다가 “독서모임 해볼래요?”라는 말을 듣고 참여하게 됐다.

처음엔 독서 모임만 하고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다음엔 풋살이 있었고, 그다음엔 스웨덴바가 있었고, 또 다른 모임들이 이어졌다. 그는 “원래 독립서점도 좋아했고 책모임도 하던 터라 가볍게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이 동네에서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고 말했다.

또래 친구들은 신기해했다. 왜 맨날 백석8블록이냐고, 대체 거기 뭐가 있길래 자꾸 가느냐고 묻곤 했다. 조씨는 “친구들이 ‘거기 꿀 발라놨냐’고 하는데, 한번 데려오면 다들 납득한다”며 “편해 보이고, 왜 자꾸 가게 되는지 알 것 같다고 한다”고 했다.

일산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이혜림씨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서울과 분당에서 살다가 직장을 따라 일산에 정착한 그는 오랫동안 병원과 집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직장과 주거는 있었지만, 그 둘 사이를 메워줄 지역 기반의 관계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이씨에게 백석8블록은 처음으로 ‘직장 밖의 삶’을 만들어준 장소가 됐다. 이씨는 “직장 때문에 온 동네 주변에서 이렇게 관계가 생긴 건 거의 처음”이라며 “이제는 집에서 소스 통이 안 열릴 때도 ‘이따 서점 가서 누가 있으면 따달라고 해야지’라는 생각이 든다”며 웃음 지었다. 직업도, 나이도, 관심사도 다른 사람들이 오직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 하나로 안전하게 어울릴 수 있는 울타리가 생긴 것이다.

“병원 안에서는 비슷한 전공, 비슷한 생활을 하는 사람만 만나는데 여기 오면 4대 보험 받는 내가 오히려 소수예요. 예술가, 자영업자, 바리스타 등 평소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재미있죠.”

세리서점에서 진행된 가드닝 프로그램.
세리서점에서 진행된 가드닝 프로그램.

단순한 소비를 넘어: 자발적 연대가 빚어낸 골목 안 '작은 순환'
백석8블록의 네트워크가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관계가 한 공간 안에서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점에서 책을 읽고, 베란다에서 커피와 디저트를 나누고, 인근 중국요리점인 주바오에서 저녁을 먹은 뒤, 스웨덴바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는 누가 기획해서 만든 동선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오가며 자연스레 빚어낸 ‘생활 밀착형 루트’에 가깝다.

윤상근씨는 “서점을 찾은 손님들에게 인근 밥집과 카페를 권하고, 그 발걸음은 다시 술집으로 이어진다”며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 지점도 거기에 있다”고 말했다. 윤씨는 “계산적으로 ‘팔아줘야지’가 아니라, 이 공간들이 있어야 우리가 누리는 재미와 관계도 유지된다는 걸 다들 안다. 그래서 서로 안 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스웨덴바 주얼 사장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이 관계는 일반적인 자영업자와 손님의 관계를 넘어서는 것 같다”며 “독서모임이나 풋살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여기 와서 또 사람을 데려오고, 거기서 또 다른 관계가 생긴다. 그게 단순히 매출뿐 아니라 공간의 분위기를 좋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베란다 조민경 사장은 아예 백석8블록 전체를 하나의 ‘지도’처럼 상상하고 있었다. “서점 들르고, 밥집 들르고, 카페 들르고, 술집 가는 루트가 자연스럽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는 친구들이 놀러 오면 이 짧은 골목 안에서 동선을 짜서 하나하나 소개한다고 했다.

조 사장은 “예전에 살던 오피스텔에서는 수천 명이 같이 살아도 아무도 몰랐는데, 여기서는 인사하는 주민이 있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이웃이 있다”며 “그게 정신적으로 매우 풍요롭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백석8블록 내 위치한 스웨덴 바에서 모임을 갖는 모습
백석8블록 내 위치한 스웨덴 바에서 모임을 갖는 모습

‘돈 주고 사고파는 건 거들뿐’ 골목을 떠받치는 비경제적 연결망
이 골목에서 오가는 것은 재화만이 아니다. 책을 사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소비행위가 주를 이루긴 하지만, 그 관계를 움직이는 힘은 그보다 조금 더 복합적이다. 이혜림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돈을 주고 사고파는 건 그저 거들뿐”이다.

이씨의 말처럼 백석8블록의 관계망은 돈을 쓰는 사람과 버는 사람 사이에서만 형성되지 않는다. 누구는 서점을 잠깐 봐주고, 누구는 바쁜 이웃 가게의 테이블을 흔쾌히 치워주고, 누구는 공연을 제안하고, 누구는 반려견과 함께 들렀다가 말을 트며 이웃이 된다.

윤상근씨는 이 관계를 “서로를 조금씩 돌보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누구 집 고양이를 봐주고, 장례식장에 같이 가고, 음식을 나누고, 잠깐 가게를 대신 봐준다. 이게 무슨 거창한 공동체 이론으로 시작된 건 아니지만, 그런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고 말했다. 

주얼씨 또한 “베란다 카페를 창업한 수인과 민경 같은 경우는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이 모임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며 “그래서 더 도와주고 싶고, 잘 정착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손익 계산보다 호감과 믿음이 먼저 작동했다”고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백석8블록은 흔한 상인회나 자영업자 네트워크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곳엔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 골목을 일상적으로 이용하고 시간을 보내는 주민과 소비자가 함께 얽혀 있다. 자영업자 네트워크가 아니라, 자영업자와 주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생활권 네트워크에 더 가깝다.

작년 12월 세리서점에서 열린 송년회
작년 12월 세리서점에서 열린 송년회

모두의 골목이 되기 위하여: 안팎의 경계와 제도의 필요성
물론 이 골목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마냥 낭만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인터뷰이들 역시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의 관계망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백석8블록 모든 상인이 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가게와 일부 주민, 일부 청년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네트워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조민경씨는 “이 동네만의 굿즈나 지도를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러면 어떤 가게는 포함되고 어떤 가게는 빠지는 문제가 생긴다”며 조심스러워했다. 윤상근씨도 “장기적으로는 몇몇 가게만 잘되는 구조를 넘어서야 한다”며 “모든 가게가 다 잘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망하는 가게를 나 몰라라 하지는 않는 관계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골목 바깥과의 긴장도 있다. 실제로 일부 업소는 야외 적치물, 외부 테이블, 작은 공연 가능 여부 등을 둘러싼 민원에 시달리기도 했다. 특정 민원인이 반복적으로 여러 업소를 신고하는 일도 있었다. 이럴 때 청년 자영업자들은 늘 기계적인 단속 앞에 놓인다.

조민경씨는 “밖에서 작은 공연 하나 하고 싶어도 어디까지 가능한지 늘 불안하다”며 “행정이 와서 ‘안 된다’만 할 게 아니라, 이런 시도를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울타리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우려도 빠지지 않았다. 윤상근씨는 “여기가 유명해지면 결국 임대료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그 정도를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때부터는 제도와 행정의 역할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세리서점에 전시되어 있는 작가 박소진씨가 백석8블뢰 풍경을 그린 그림들. 
세리서점에 전시되어 있는 작가 박소진씨가 백석8블뢰 풍경을 그린 그림들. 

완성된 모델은 아니지만 분명한 가능성의 씨앗
백석8블록은 아직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다. 이 골목 밖에는 여전히 이 네트워크와 무관하게 하루하루 버티는 자영업자들이 있고, 모든 상점이 이 온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곳을 섣불리 미화할 수도, 만능 대안처럼 포장할 수는 없다. 

그러함에도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보여준다. 골목상권의 활력은 반드시 대규모 예산, 공모사업, 관 주도의 이벤트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때로는 작은 서점 하나가 관계의 입구가 되고, 그 관계가 인근 식당과 카페, 술집과 주민의 일상으로 번지며 느리지만 실제적인 순환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행정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이곳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말한 것은 “기획자가 되려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관계를 설계하고 프로그램을 얹는 순간 오히려 자발성은 꺾일 수 있다. 대신 필요한 건 뒷배 역할이다. 소규모 공연과 장터, 야외 영업 같은 생활 실험이 가능한 제도적 틈을 열어주고, 과도한 민원과 단속으로부터 보호하고, 임대료 급등과 같은 젠트리피케이션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일 말이다.

윤상근씨는 “행정이 해야 할 일은 이런 자생적 관계망을 지키기 위해 뒤를 받쳐주는 것”이라며 “와서 뭘 시키거나 성과를 만들려는 방식은 오히려 망칠 수 있다”고 말했다.

리혁종 작가 또한 “이런 곳의 가치는 돈으로만 환산되지 않는다. 공동의 자산이 쌓여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며 “뭔가가 쌓이고 있는 현장을 성급히 성과로 소비하지 말고, 시간이 흐르도록 지켜보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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