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종 기자의 역사문화탐방
③ 탕춘대성에서 북한산성으로
홍제천 분지 군사방어시설 내부순환로에 떠밀려
성곽-하천 잇는 홍지문, 오간수문 빼어난 건축미
비봉·사모바위~청수동암문으로 북한산성 입성
[고양신문] 한양도성 궁궐을 출발해 북한산성 행궁을 향하는 두 번째 여정은 탕춘대성의 중심 성문인 홍지문이 시작점이다. 고양에서 홍지문을 찾아가려면 지하철 3호선 홍제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면 되는데, 시간 여유가 있다면 홍제역과 홍제천 주변의 역사 흔적들을 먼저 살펴보고 가도 좋다.
조선시대 사신 맞았던 국립여관 ‘홍제원’
행정동과 지하철역, 하천명에 두루 쓰이는 ‘홍제’라는 이름은 ‘널리 백성을 구제한다’라는 뜻으로서, 조선시대 한양도성 서쪽의 국립 숙박시설인 홍제원(弘濟院)에서 유래됐다. 도성 밖 성저십리 한성부의 서쪽 끝 지점에 자리한 홍제원은 돈의문(서대문)을 나와 영은문과 모화관, 무악재고개로 이어지는 의주대로의 관문이었다.
특히 홍제원은 중국으로 출발하거나 중국에서 찾아오는 사신단이 유숙하는 중요한 국제외교 시설이었다. 당시 사신단 규모는 100명이 넘었기 때문에 홍제원 주변에 주막과 마을이 흥성했었다고 한다. 홍제원은 조선의 국운이 기울던 1895년 사라졌는데, 홍제역 2번 출구에서 200m 지점에 있는 홍제2동 새마을금고 앞 통일로변에 ‘홍제원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홍제천 위 유진상가, 전시에는 방어시설
의주대로가 사람이 닦은 길이라면, 자연이 터놓은 길은 홍제천이다. 북한산 평창계곡, 인왕산 백사실계곡에서 발원해 종로구와 서대문구, 마포구를 관통한 후 망원한강공원에서 한강과 만나는 홍제천의 옛 이름은 사천(沙川), 우리말로는 모래내다. 두 개의 바위산을 깎아내리며 깨끗한 모래들을 실어 날랐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주대로와 하천이 교차하는 홍제천 분지는 도성 서쪽의 교통 요지였고, 이는 바꿔 말해 전란 시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군사방어 요충지라는 뜻이다. 이곳에 탕춘대성이 만들어진 이유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과거의 교통·군사 요충지는 대부분 현재도 같은 기능을 한다. 남북의 군사적 대립이 최악으로 치닫던 1970년대 초 서울 서북쪽에는 도심 군사방어 시설이 순차적으로 만들어졌는데, 통일로와 홍제천이 교차하는 지점에는 복개된 하천부지 위에 성벽 모양의 긴 주상복합건물인 유진상가가 만들어진다. 이 건물이 북의 남침에 대비한 대전차방어 목적으로 설계됐다는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다. 유진상가가 오늘날의 탕춘대성인 셈이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나 내부순환도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고가도로와 접한 B동 상층부가 뭉텅 잘려 나가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안보 논리가 교통수요 팽창에 밀린 것이다. 반세기 시대상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유진상가 사거리 건너편에서는 조선시대 돌다리 위치를 알려주는 ‘홍제교(弘濟橋)터’ 표지석도 찾아볼 수 있다.
탕춘대성의 관문,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유진상가와 인왕시장을 지나 홍제천을 따라 걷다 보니, 동남쪽 인왕산 능선과 서북쪽 북한산 능선이 가파르게 깎아 내려와 만나는 지점에 탕춘대성의 관문 홍지문(弘智門)이 나타난다. 사각형의 단단하게 쌓은 몸체와 둥근 홍예(虹蜺, 상부를 무지개 모양으로 쌓은 다리나 문구멍), 우아하게 장식된 문루가 ‘널리 지혜를 펼친다’는 이름처럼 기풍 있게 어우러진 모습이다. 숙종은 재위 41년 되는 해(1715년)에 탕춘대성의 중심문을 완성하고 직접 편액을 써서 하사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한양도성 북쪽에 있다 하여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불렸다.
홍제천을 가로지르는, 홍지문과 나란히 이어진 다리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다. 다섯 개의 아름다운 홍예가 이어진, 물이 통과하는 커다란 통로라는 뜻이다. 가까이서 봐도 멋지지만, 조금 멀리 떨어져 홍제천과 홍지문, 오간대수문, 그리고 오간대수문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탕춘대성 성곽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조망하면 자연지세와 조화를 이루는 옛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멀리하면, 바로 뒤가 상명대학교 캠퍼스이고 그 너머로 한양도성에서 조망되는 북한산의 대표 경관인 문수봉의 날카로운 산마루가 하늘을 향하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북한산을 향해 출발해 보자.
밟고 허물고… 오랜 세월 방치된 성곽
탕춘대능선 등산로는 상명대학교 캠퍼스를 통과해 시작된다. 상명사대부속여고를 지나면 오래된 돌담이 나타나는데, 바로 탕춘대성이다. 아래쪽은 북한산자락길 데크를 따라 완만하게 시작되지만, 곧 성곽과 나란히 걷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주변의 불광동이나 구기동, 정릉에서 출발하는 등산로에 비해 비교적 등산객이 적은 코스라 호젓한 산행을 여유롭게 즐기며 걷는다.
성곽은 북한산성과 거의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능적 견고함을 구현한 당대의 축성법을 잘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숙종이 승하하자 축성의 열기가 사그라들고, 이후 300여 년 세월 동안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방치됐었다. 등산객들이 성곽 위를 함부로 걸어 다닌 흔적이 역력하고, 등산로와 교차하는 지점은 여지 없이 성돌을 무너뜨려 통로를 냈다. 이제라도 세계유산 후보라는 위상에 걸맞도록 관리와 복원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돌틈마다 남아있고 칼바람이 목을 움츠러들게 하지만, 하늘이 청명해 기분은 더없이 상쾌하다. 왼편으로는 은평구 도심이, 오른쪽으로는 평창동 주택가와 이북5도청이, 뒤를 돌아보면 인왕과 북악과 남산의 실루엣이 조망된다.
비봉에 서린 진흥왕의 기개, 추사의 안목
서쪽으로 족두리봉이 모습을 드러낼 즈음 탕춘대성 암문(暗門)이 나타난다. 북한산성의 여러 암문들과 비슷한 구조로, 크고 넓은 판돌을 두툼한 기둥돌이 받치고 있는 모양새다. 암문을 지나면 점점 경사가 가팔라지고,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등 암릉의 우람한 산세가 보이기 시작한다. 천혜의 비경이자 요새인 북한산의 품에 점점 안기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옛 절터인 포금정사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가파른 돌길을 오르니, 북한산 봉우리들 중 가장 웅대한 역사의 흔적을 품고 있는 봉우리 비봉(碑峯)이다. 수 세기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삼국 영토전쟁의 승자인 신라 진흥왕은 한반도 중앙의 새로운 주인이 자신임을 만천하에 선언하기 위해 한강과 서울 땅이 한눈에 조망되는 북한산 바위 봉우리 꼭대기에 순수비(巡狩碑)를 우뚝 세웠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비석의 주인은 잊혀졌다. 그러다가 1816년, 금석학(金石學, 비석이나 바위의 문자를 해독하는 학문)과 고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가 마모된 비문의 글자 68자를 해독한 후 “이 비석은 신라 진흥왕이 세운 비석”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조선 후기의 천재 지식인이 오해와 오독의 장막을 걷어내고 1200여 년 넘게 잠들어 있던 바위산 꼭대기 비석을 흔들어 깨운 것이다. 현재 순수비 실물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동일한 모양의 모형물이 세워져 있다.
선사시대부터 경외했던 큰 돌 ‘사모바위’
능선을 따라가면 마주할 때마다 압도감을 선사하는 사모바위가 나타난다. 북한산을 통틀어도 가장 유명한 바위다. 우리 민족이 상고시대부터 산악을 숭배했다는 사실은 수많은 역사서가 증언하고 있다. 특히 변함없는 모습으로 세월을 이겨내는 북한산의 암릉(岩陵)과 거석(巨石)들은 그 자체로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사각형 모양의 사모바위는 고대로부터 산신제를 올리던 올리던 제사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모바위 위쪽 전망 포인트에서는 보현봉과 문수봉, 나월봉, 나한봉이 파노라마처럼 조망된다.
사모바위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관리들이 쓰던 ‘사모(紗帽)’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우리나라 거석신앙의 상징 같은 존재를 단순히 모양새만으로 명명한다는 게 아쉽기만하다.
북한산성으로 향하는 길은 승가봉과 통천문을 지나 바윗길을 내려온 후, 또다시 가파른 너덜지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너덜은 가파른 절벽에서 무너져 내린 암석이 거대한 덩어리로 쌓인 지형을 말하는데, 지질용어로는 애추(崖錐)라고 부른다. 성곽을 걷다 보면 ‘이 많은 돌덩이를 다 어디서 날라왔을까?’ 궁금증이 솟곤 하는데, 끙끙거리며 너덜지대를 오르다 보면 궁금증이 해소된다. 돌덩이가 참 많고도 많다.
암문과 대문 비추는 화사한 겨울 햇살
숨이 차오를 때쯤 나타난 데크계단이 반갑기만하다. 북한산성에 거의 도착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 고갯마루, 탕춘대성과 비봉을 거쳐 북한산성으로 입성하는 관문인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이다. 북한산성에는 총 16개의 성문이 있는데, 대문이 6개, 암문이 8개, 수문이 2개다. 화려한 문루를 갖춘 대문이 임금이나 대신들의 행차에 문을 열었던 의전적 성격의 문이었다면, 문루를 생략한 암문은 북한산성을 지키는 군문 병사와 승군, 성 안 주민들과 물자가 드나들었던 일상의 통로였다.
성곽의 돌틈마다 희끗한 눈자국이 남아있고, 겨울 오후의 조급한 햇살이 암문을 통과해 밝은 실루엣을 드리운다. 비록 스마트폰이지만, 사진이 예쁘게 찍힌다. 여러 번 북한산성을 찾았지만, 이렇게 햇살의 각도와 풍경이 절묘하게 들어맞는 순간은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다.
해가 더 기울기 전에 발길을 재촉해 대남문(大南門)으로 향한다. 대남문은 산성 축조 당시에는 소남문(小南門)으로 불렸지만, 1760년 이후 오랫동안 닫혀있던 대성문(大成門)을 대신해 북한산성의 실질적인 정문 역할을 하게 되면서 대남문으로 이름이 승격된다. 또한 대문이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목재와 기와로 아름다운 문루도 얹는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북한산성 유적들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무너져 내린 것들을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복원한 것들이다.
가볍게 눈길을 밟으며 잠깐 걸으니 대남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에는 햇살이 홍예 모양으로 대문을 통과하며 보다 멋진 풍광을 그려낸다. 문루의 날렵한 처마 밑 서까래와 단청을 아래로부터 올려 비추는 햇살이 신비롭고 따스하다. 마음에 오래 새겨두고 싶어, 사진에 담고도 오래도록 한자리에 서서 바라본다. 비봉을 지난 이후 등산객을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을 정도로 춥고 외로운 산행이었지만, 이 장면 하나를 만난 것만으로도 보람이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