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종 기자의 골목나들이] ① 원일산 원일로
신도시 이전 인구 몰렸던 고양군 서부 중심거리
행정기관, 교회당, 터미널… 길 따라 주요 건물 빼곡
소규모 자영업 상권, 조선족 생활 거점 자리 잡아
[고양신문] ‘일산’이라고 하면 대개 아파트가 빼곡이 들어선 계획도시 이미지를 떠올린다. 1990년대 초 1기 신도시 중 하나로 일산신도시가 만들어지며 전국적 지명도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산신도시 이전에도 당연히 ‘일산’은 있었다. 1904년 경의선 철도가 부설되며 일산역이 생겼고, 이어 일산시장이 들어섰고, 고양군 중면이 1980년 읍으로 승격하며 ‘일산읍(一山邑)’이 정식 행정구역명이 됐다.
1980년대 일산읍은 원당읍과 함께 고양에서 가장 번화한 도심이었다. 일산역과 일산시장을 중심으로 유동인구와 상권이 몰렸고, 각종 행정기관들이 들어서서 고양군 중서부의 중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일산신도시가 생기며 과거 일산읍 도심을 이뤘던 현재의 일산1·2동 지역은 ‘구일산’이라는 마뜩찮은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이에 대한 반감으로 토박이 주민들은 “원일산, 또는 본일산으로 불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산1·2동 중심 지나는 1.3km 찻길
원일산의 중심 도로는 골목나들이의 첫 행선지인 ‘원일로(元一路)’다. 고봉로와 접한 일산2동행정복지센터에서 시작하는 원일로는 고양대로와 약 200m 거리를 두고 동서로 나란히 달리다가 일산지하차도 앞에서 고양대로에 합류한다. 편도 1차로, 길이 1.3km에 불과한 짧고 협소한 도로지만, 이름에서 짐작되듯 원일산의 다양한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는 시간의 지층과 같은 길이다. 구도심 길들이 대개 그렇듯 원일로 역시 자연 지형 그대로 도로가 났기 때문에 오르막과 내리막을 두 번이나 반복한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는 도로 인프라 개선 없이 일산읍 인구가 폭증하다 보니, 고양시에서 가장 혼잡하고, 교통사고 위험이 높은 길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원일로 좌우에 들어선 주요 건물들은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이 길의 위상을 방증해준다. 공공기관으로는 일산2동, 일산1동 행정복지센터가 각각 길의 동, 서쪽에 자리하고 있고, 일산서구보건소와 일산2동 우체국, 지역금융기관인 일산농협 본점도 원일로와 접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일산중학교, 일산고등학교, 한뫼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까지 각급 학교가 모두 원일로 좌우에 포진해 있다. 종교시설로는 오랜 역사를 지닌 천주교 일산성당과 80년대 개신교 부흥기에 웅장한 벽돌건물을 지은 신광교회가 있고, 대중교통의 두 축인 옛 버스터미널과 택시정류장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 무엇보다도 원일로 중간지점에서 시작해 일산역 방향으로 내려가는 일산시장이 오늘날에도 원일로에 북적이는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80년대 연립주택 대명사 ‘허스맨션’
이제 원일로를 천천히 걸으며 마주치는 풍경들을 살펴보자. 일산지하차도에서 시작하는 길의 서쪽은 자동차 정비소, 주류 도매상, 세차장 등 건물 밀도가 낮고 넓은 바닥면적을 필요로 하는 업종들이 차지하고 있다.
신광교회 주변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일산 허스맨션이다. ‘허스(HURS)’는 고양의 토박이들에게는 추억을 소환하는 이름이다. 80~90년대 고양군에서 저층 빌라 건축 붐을 주도했던, 허스개발이 지은 지역 대표 주택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허스맨션 또는 허스아파트라는 이름으로 지은 공동주택들은 원일산 뿐 아니라 능곡 토당동과 관산동 구도심에도 지어졌다. 하지만 토당동 허스맨션은 수년 전 재건축조합 신축아파트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철거됐다. 지상3층, 4개 동으로 지어진 일산 허스맨션도 주변의 주택정비사업 추진으로 조만간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될지도 모른다.
허스맨션은 하나같이 화사한 벽면에 붉은 기와를 얹은 산뜻한 외관을 하고 있고, 버거킹 마크를 닮은 귀여운 영문 로고로 아파트명을 표기했다. 고양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주택 건물들인데, 디자인 측면에서는 정감 있고 레트로한 매력이 여전하다.
담 하나 이웃한 일산성당과 벽화골목
허스맨션과 한뫼초등학교를 지나면 오르막길인데, 언덕의 정점에 천주교 일산성당이 자리한다. 1930년 일산공소로 출발해 1958년 일산본당으로 승격한 일산성당은 90년대 이후 백석동성당, 탄현동성당, 중산동성당 등을 분당시킨, 일산동·서구 가톨릭의 모태와 같은 역할을 한 성당이다. 성당 경내로 들어서면 다소 복잡했던 도로변 분위기와 대조되는, 고요하고 경건한 풍경이 펼쳐진다. 붉은 벽돌 종탑이 수직으로 솟아있고, 삼각지붕 본당 정면에는 흰 천사상을 두른 장미창이 햇빛을 받아들이고 있다. 본당 뒤편에는 마리아상을 알현하는 호젓한 정원과 성당의 부속 건물들이 이어진다. 최근에 지은 종교건축물에서는 맛보기 힘든 넉넉하고 여유로운 공간 경험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일산성당이다.
일산성당과 담 하나로 맞붙은 곳에는 원일산의 가장 오래된 주택들을 볼 수 있는 골목이 남아있다. 차가 들어올 수 없는 좁을 골목 양편으로 벽돌이나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낮은 집들이 이어지는데, 판자로 가건물을 덧대기도 했고 슬레이트 지붕을 여전히 얹고 있는 집도 눈에 띈다. 먼 배경으로 펼쳐진 고층아파트와 함께 수십 년 시층(時層)이 하나의 구도 속에 담긴다. 아마도 폐가가 철거됐을 골목 안 공터는 주민들의 알뜰한 텃밭이 되었다. 어느 집은 사찰 간판을 달았는데, 붉은 갈색으로 불록담 테두리를 칠해 절집 단청 분위기를 냈다. 벽에는 이런 저런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색을 그린 지도 어느덧 14년이 넘다 보니 집과 그림이 함께 퇴색되어 가는 느낌이다.
골목을 걷다가 구식 카메라를 목에 걸고 골목사진을 찍고 있는 젊은 커플을 만났지만, 서로 말없이 반대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도 누군가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를 구경꾼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게 이무래도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옛 시절 말해주는 오래된 가게들
원일로의 나지막한 상가 건물들에는 전파사, 총포사, 낚시용품, 철학관, 자동펌프, 불교용품점, 종묘농약사, 건강원, 인력사무소 등 요즘에는 점점 사라져가는 업종 간판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뫼초를 지나면서 각급 학교가 밀집해 있지만 서점과 문구점은 딱 하나씩밖에 없고, 학원, 교습소, 소규모 식당 등이 밀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업종은 아무래도 자영업의 대명사인 음식점이다. 하지만 대부분 규모가 작고, 간판만 덩그러니 걸린 채 셔터가 내려가 있는 점포들도 많아 점점 위기로 내몰리고 있는 소규모 외식업의 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일청로 교차점과 일중로 교차점 사이에는 카페, 노래방, 술을 파는 다방 등 소규모 유흥업종들이 건물마다 간판을 내걸고 있다. 80년대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하던 시절부터 논란이 됐던, 원당과 일산 등 구도심의 유흥문화 밀집 현상이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오는 듯하다.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곳곳에서 눈에 띄는 한자어 간판이다. 북경오리, 마라탕, 양꼬치 등 정통 중국음식 식당들도 있고, 여행사, 환전소, 중국식품점도 보인다. 이런 간판들은 대개 한자 또는 간자체로 메인글씨를 쓰고, 한글을 작게 병기했다. 이유는 당연히 원일산이 조선족 이주노동자들의 생활 거점이기 때문이다. 원일산 주변의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거처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많고, 주변에 거주하는 이들도 주말이면 원일산 쪽에서 장을 보고, 정보를 나누는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주노동자 커뮤니티는 경기북부 구도심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파주나 양주 쪽은 동남아나 중앙아시아 모임이 많은 반면, 원일산 지역은 조선족 커뮤니티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다. 때문에 조선족 출신 사장님들이 소규모 식당이나 접객업소를 직접 운영하는 경우도 많다.
버스 경적소리 멈춘 명성터미널
원일로 서쪽의 인상적인 건물이 허스맨션이라면, 원일로 동쪽에서 과거를 상징하는 건물은 옛 명성터미널이다.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는 ‘일산터미널’이라고 명기됐지만, 토박이들은 다들 운영사인 명성운수의 이름에서 따온 ‘명성터미널’로 불렀다. 길 건너편 ‘명성이용원’ 간판이 이를 방증한다. 시내버스는 물론 서울로 나가는 버스, 또는 경기북부의 이웃 도시로 올라가는 버스가 이곳을 기점 삼아 출발했다.
하지만 터미널로서의 기능을 일찌감치 마감하고, 현재는 명성운수 차고지고 사용되고 있다. 당시로서는 터미널로서 손색없었던 3층 건물에는 다방, 이발소, 단란주점 등의 간판이 아직 남아있지만, 현재는 의류세일장터만 일부 공간에서 틈새영업을 하고 있다.
방문하려면 일산시장 공영주차장 추천
원일산의 유동인구를 지탱하고 있는 일산시장의 메인 동선은 남쪽 고양대로변이지만, 북쪽 원일로변에도 장날이면 약국 앞에도, 횟집 앞에도 좌판이 제법 펼쳐진다. 대개는 직접 수확한 제철 농산물을 싸들고 나온 어르신들이다. 원일로와 일청로가 교차하는 삼각지점에는 버스정류장과 택시정류장도 한 지점에서 만난다.
무심하게 지나치면 복잡하고 협소한 구도심 찻길이지만, 시간 감각을 장착하고 살펴보면 수십년 시층이 복잡한 무늬를 그리고 있는 곳이 원일로다. 맘먹고 방문해보고 싶다면 일산시장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바퀴 산책해보길 추천한다. 주차비도 저렴하고, 일산시장 맛집 중 하나를 골라 식사를 하면 그마저도 무료다.
